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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판은 켄타 키요노부 六단과의 대국이었다. 미리 이야기를 하면 이 대국은 대회 전체에서 내 모든 능력을 쏟아부은 대국으로 생각한다. 지금까지 출전한 세 대회에서 모두 마지막 판에 아쉬움이 남았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대국 당시에는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고, 체력 부족과 패배에서 받은 충격에 반쯤 머리가 멍해있던 상태였다.
내가 흑을 잡고 Rose-Tamenori/Rose-Birdie로 이어졌다. 17수까지는 상호 최선 진행으로 이어졌고 18수 백 E2는 왕중왕전 때 동권 님께서 두신 수였다. 이 진행에서 실수를 한 적이 있었기에 최선 수순을 조금 더 봐 뒀다. 그래서 23수까지는 확실히 알던 최선 진행으로 갔다. 24수 백 A6 이후에는 최선 진행을 기억하지 못하였으나 25수 흑 A5는 최선수였고, 상대가 익숙한 길이여서 그런지 바로 최선수인 26수 백 A4로 응수하였다. 이 때 상대 B6가 여유수로 남아있는 상황이 껄끄러웠고 내 여유수인 C2를 아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C2를 두면 내가 상변에 둘 수 없기에 추후 공격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생각한 곳은 27수 흑 C7으로 이후 28수 백 B6로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실전의 진행도 동일하였는데 -6짜리 차선수였다.
이 다음도 고민이 되는 순간이었는데 이 때 역시 C2를 아껴야겠다고 생각했다. X 스퀘어인 B7도 무모하게 느껴져서 29수 흑 D8로 G4를 노리는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D8은 -8으로 차선이었고 C2와 F7이 -6짜리 최선이었다. 특히 F7을 뒀을 때 백이 E7을 둘 수 없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상대는 D8에 +6 차선인 30수 E7으로 응수했고 G4로 바로 들어갈 경우 상대에게 F7로 들어갈 길을 열어주기에 31수 흑 E8을 택하였다. 하지만 이는 -10짜리 차차선으로 흑 G7, 백 F7 이후 흑 F8을 두면 백은 하변에 둘 곳이 E8 밖에 없어지고 E8을 둔 이후 흑 대응도 어렵지 않다는 것을 간과하였다. 반대로 흑 E8에 백 F7, 흑 G4로 대응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착수하였으나 그 이후 백이 F8에 착수하면 흑 입장에서는 갑갑해지게 된다.
하지만 백은 +8인 32수 F8으로 응수했고 33수 흑 G4를 착수하면서 34수에 백이 F7을 둔다고 해도 35수 흑 G8을 대각 방향으로 뒤집어지는 돌 없이 둘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불균형한 변이기는 하지만 스토너 트랩 등으로 바로 공격당하지 않기에 선택을 하였다. 35수까지 위와 같이 진행되었고 최선 수순이었다. 36수에서 최선수인 백 H5를 택하였는데 이는 한 방향으로만 돌을 바꾸는 조용한 수이기 때문이다. 이 때 C2 또한 C6를 열어주기에 위험 부담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10으로 최선인 37수 흑 H4를 뒀고, 백이 H6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수를 두면서 38수 백 G7이 최선일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X 스퀘어를 찔리자 내 부족함을 간파당한 듯 마음 한 구석 역시 쿡 찔리는 느낌이었다. 이 시점에서 가장 긴 장고가 시작되었다.
39수로 처음 고려했던 수는 B7이었다. 백이 바로 A8을 공격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렘 님도 B7을 이야기 하시면서 X 스퀘어를 먼저 찔러주고 상대 대각을 자르는게 상대를 더 괴롭힐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B7, C7, D7, D8을 흑이 감싸게 되면서 추후에 하변이나 좌하쪽에서 돌을 많이 잃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다음 후보수로 넣은 곳은 A7이었다. A7으로 D4 돌을 흑으로 바꾼 다음 다음 수에 H8으로 들어갈 심산이었다. 그 때 내가 예상한 진행은 39수 흑 A7, 40수 백 A8, 41수 흑 H8, 42수 백 B8, 43수 흑 C2, 44수 백 C8, 45수 흑 B7이었고 이는 실전에서 그대로 진행되었으며 최선이었다. 처음 생각했던 B7은 -12로 차선이었고 또 다른 최선에는 A2, A3가 있었다.
당시에는 40수로 백 A8이 자명하다 생각하였으나 차선인 C8도 충분히 가능한 수였다. 41수 흑 H8로 우하귀를 먹은 이후에는 다른 곳으로 발 빼기 어렵다 판단하였고 좌하쪽 세 칸 중 하나로 갈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 중 B8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42수로 백 B7은 B8, C8을 백이 둘 수 없게 만들기에 불리하다 생각하였는데 B8과 함께 최선이었다. 이 때 제 때 못 쓰고 아껴뒀던 C2를 43수로 두면서 백으로 하여금 좌하쪽 두 칸 또는 우하쪽 두 칸으로 가도록 강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백이 44수로 F2를 두면 B7을 둘 수 없게 되므로 후보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수 역시 C8과 함께 44수 상황에서 최선이었다. 44수 백 C8, 45수 흑 B7까지 내 수 읽기를 따라 최선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때 깨달은 점은 B7부터 F3까지 전부 흑이여서 추후 대각을 빼앗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상대는 조용한 수인 46수 백 F2를 택하였고, 둘 만한 곳이 A3 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48수에서 백의 최선은 H3로 흑이 둘 수 있는 곳을 말려가는 선택이다. H3 이후 흑이 우변의 두 칸에 두지 않으면 좌상을 내줄 수 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상대는 +4 차선인 48수를 택하였다. 이 때 49수 흑 B2를 두면 화이트 라인 대각을 흑이 차지하고 백이 끊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착수를 하였다. 상대는 흑이 상변을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최선인 50수 백 D1을 뒀다.
이 때까지는 나름 잘 버티면서 접전으로 끌고 왔지만 이후 실수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51수 상황에서 다른 곳은 두면 안되고 A2 아니면 B1이었는데 -10인 차선 B1을 뒀던 것이다. 지금 보면 너무 당연하게 A2를 뒀을 것인데 대회 막바지여서 그런지 생각을 제대로 못 한 것 같다. G1은 흑, 백 모두 두기 껄끄러운 곳인데 흑이 B1을 두면서 백은 A1으로 상변을 차지하게 되고 G1 역시 두기 편해졌던 것이었다. A2를 뒀으면 G1은 서로 두면 불리한 곳으로 남았을 것이다. 만약 흑이 51수로 A2를 뒀을 경우, 백의 최선은 H2로 흑이 스스로 F3의 돌을 흑으로 바꾸게 하여 백이 G2로 대각을 차지하게 만드는 수순이다. 이후 수순은 서로 최선으로 이어져 27-37의 아쉬운 패배로 마무리 되었다.
마지막 판을 두고 나서 대회가 끝났다는 점에서 후련하기도 하면서 대국에 대한 후회는 다른 판에 비해 더하였다. 다른 판에 비해 점수 차가 적은 석패였다는 것도 이유지만 다른 판에 비해 좀 더 수읽기가 명료하게 됐다는 것과 치명적인 악수가 없었다는 것이 내 마음에는 의미있게 다가온 것 같다.
내 대국이 끝난 이후에도 쿨러 님 판이 끝나지 않았었다. 쿨러 님은 비교적 빨리 두기에 늦게 끝나는게 의아했지만 7판을 내리 두고 지쳐서 대국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관전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고 그 경기의 결과는 2017년 세계 대회 5위의 후쿠나가 코하치 7단을 상대로 33-31로 신승을 거뒀다. 이 1승은 한국 오델로계의 저력 또는 잠재력을 보여주는 한 판이었다.
모든 대국이 끝난 이후 한국 팀 선수 및 관계자들 모두 허탈해보였다. 1회 한일전의 6.5승에 비교하면 적은 4승이라는 결과 때문일 수도 있고 세계 최상위권 / 상위권 기사와의 격차를 온몸으로 느껴서였을지도 모른다. 대회가 끝나고 일본팀에 단체상 수상이 있었다. 상패와 함께 금박 초콜렛으로 만든 메달 수여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웃으면서 지켜보기는 어려웠다. 아래 단체 사진만 봐도 표정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차이가 보인다. 폐회사에서 한일전은 2회로 마무리되고, 내년부터는 동아시아컵으로 대회를 확대해서 개최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괜히 한국팀의 경쟁력이 떨어져 한일전이 없어지는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찔렸다.
대회가 끝나고 호텔 옆쪽의 한식집에서 뒷풀이가 있었다. 테이블 중 절반에는 감자탕, 나머지 절반에는 부대찌개가 있었다. 돼지 뼈를 뜯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감자탕 테이블에 일본 선수들이 다 앉아서 부대찌개로 마음을 바꿨다. 좀 더 적극적인 성격이었으면 누구 한 두 명이라도 붙잡고 테이블에 낑겨들어가 부족한 영어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는데 대회에서 너무 못 뒀다는 생각이 앞서 그냥 익숙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같은 테이블에 야마카와 타카시 七단과 타츠미 유키코 六단이 있었다. 식사와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친선전을 하면서 대회의 여운을 정리하였다.
사실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마지막 판 기보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진 판에 대한 창피함 때문에 직접 물어보기 부끄러웠다. 하지만 해산할 때 켄타 키요노부 六단을 붙잡고 복기를 부탁드렸다. 이 순간이 지나면 기보를 복기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판 기억나냐는 말로 운을 띄운 다음, 내가 이번 대회에서 가장 잘 둔 판이라고 하면서 복기를 부탁하며 핸드폰을 건냈다. 간단히 그렇다는 대답과 함께 바로 대국을 복원하였다. 아직도 복기를 못하는게 답답하기도 하고 복기 가능한 사람을 보면 신기한 건 여전했다.
2017년 10월에 첫 대회를 참가한 이후 한일전 전까지 총 3번의 대회를 참석했다. 첫 대회 때에는 미지의 고수를 만나는 것 만으로도 긴장되고 압도되는 느낌이 있었는데 2회 수원 대회와 왕중왕전을 지나면서 한국의 고수들과 대회에서 만나는 것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아직도 렘 님은 무섭다.) 하지만 이번 한일전 때에는 세계 정상급 기사들을 상대해서 그런지 기가 죽은채로 대국을 한 것 같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어있는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 알아도 실전에서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일본 기사를 만나는 귀한 기회에서 내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한 것 또한 아쉽게 다가온다. 긴장해서 그런지 수읽기 했던 것을 잊기도 하고 수읽기를 했던 부분을 또 다시 생각하기도 했다. 이 역시 앞으로 오프라인 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고쳐야 될 부분이다.
예전에 렘 님과 동권 님께서 고수와 계속 맞붙어야 고수를 상대할 수 있는 힘이 키워진다고 한 적이 있다. 앞에서 이야기 한 모든 부분이 결국 실전 경험에서 쌓이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일본에 부러운 점이 많다. 대회가 끝나고 볼짱 님께서 타츠미 유키코 六단에게 일 년에 대회를 얼마나 나가는지 물어봤는데 30번 내외라고 답하였다. 대회에서만 두는 대국이 200판을 넘는다는 것이다. 아마 나는 일 년에 대회에서 30판 정도 두는게 전부일 듯 싶다. 다른 기사분들도 오프라인에서 두는 경험의 필요성을 크게 체감한 듯 싶다. 한일전 이후로 시간이 되는 사람들끼리 모여 매주 주말 오델로를 두고 서로 복기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이 자양분이 되어 더 큰 무대에서 고수들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실력 때문에 좋은 대국을 보여드리지는 못해드려서 죄송하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또한 대회에 참여하신 모든 선수분들과 양국 협회 관계자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나중에 일본 대회를 나가던, 국제 대회에서 만나던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세게 맞붙고 싶다.
* 나카지마 테츠야 八단이 유튜브에 한일전 각 대국에 대한 동영상을 올리다가 지금은 소식이 없는 상황입니다. 나중에 혹시나 제 대국에 대한 동영상이 올라오면 번외편으로 글을 써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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