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델로 전국 선수권대회가 있었고 4승 1무 2패로 4위, 통산 전적 66.67%를 그대로 유지했다. 대국 하나 하나에 각자의 스토리가 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대국은 7라운드 마지막 대국이었다. 매 대회 때마다 마지막 판에서 만족스러운 대국을 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시각장애인과의 대국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오델로에서는 상대 차례에는 판 위에 손을 올리면 안되고, 자기 차례에서도 돌이나 손으로 특정 칸을 접촉할 경우, 착수 가능한 경우에 한하여 그 칸에 무조건 착수를 해야한다. 하지만 그 분은 판에 더듬으면서 돌을 만져야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 오델로 선수가 있어서 손으로 돌을 만지면서 대국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실제로 보니 신기할 뿐이었다. 방금 둔 대국조차 복기하지 못하고 판 모양도 기억을 잘 못하는 나에게는 촉감만으로 판을 파악하고 둘 곳을 찾는다는 것이 불가능의 영역으로 보였다.
나는 판을 보면서 돌 하나씩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모양과 주변 돌과의 연계 가능성, 착수 가능한 지점을 파악하는 편이다. 하지만 판 위의 돌을 만지면서 파악하는 것은 돌을 낱개로 파악하는 것이다. 돌 하나 하나에서 전체를 파악하고 여러 방향으로의 확장 가능성을 파악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대국 내내 그 분의 손에 집중하게 되었다. 판을 전반적으로 훑기도 했고, 특정 부분을 집중적으로 만지는 것 같기도 했으며 줄 단위로 만지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손의 움직임을 보면서 어느 정도 생각을 따라잡을 수 있을거 같기도 했다. 그 분에게는 판을 만지는 것 자체가 수 읽기와 연동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보니 판을 만지는 것을 보면서 내 생각과 비교하게 되고 상대의 수도 예측할 수 있었다.
손의 움직임을 보면서 인상 깊게 다가온 점은 일직선으로 따라가면서 만지는 것이었다. 라인을 점유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둘 수 있는 곳과 착수 지점의 가치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잠깐 마음을 놓고 느슨하게 생각하다가 꼭 생각해야했던 라인을 놓치면 그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모든 라인을 한 번씩 생각해보면 그만큼 실착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 외에도 그 분이 판을 만지는 과정에서 오델로 수읽기에서 중요한 부분을 볼 수 있었다.
5단이라는 상대의 단수는 판에서 여실히 들어났다. 초반 몇 수 지나지 않았는데 초반 모양이 빡빡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델로를 두다 보면 승부의 분수령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 대국에서는 초반 20수 정도 그 느낌이 계속 되었고, 쉽게 받아버리면 안되며 수 읽기를 촘촘히 해야된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계속 신중하게 가면서 시간을 많이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상대의 실수로 수 읽기가 편해지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다가 나도 실수를 범하였다. 실착을 두기도 했는데 하필이면 그 순간 뒤집기에서 실수를 했다. 심신이 지쳐서 실수가 나온 것 같았다. 그 때는 내가 잘못 뒤집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평소에는 뒤집은 직후 상대가 언급을 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어디를 둘까 생각을 하는데 상대가 갑자기 착수 없이 대국 시계를 눌렀다. 그러면서 정확하게 내가 뒤집지 않은 돌을 지적하면서 뒤집을 것을 요청하였다. 그 순간 나는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정말 나도 모르게 한 실수였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상대가 잘못 뒤집은 상황을 파악할 정도로 판에 대한 이해가 높다는 것에 놀라웠다. 나는 절대로 못 할거 같은 경지였다.
초반에는 내가 불리함을 느꼈다면 중반 이후에는 상대가 불리함을 느꼈던 것 같다. 돌이 많이 놓이면서 판을 만지는 시간도 늘어나고 만져봤던 곳을 여러 번 다시 만지면서 장고하는 모습이 늘어났다. 중반 이후에는 내가 유리한 순간이 많았지만 시간과 체력의 부족으로 두 번의 큰 실착이 있었다. 내가 유리하게 봤던 형세도 어느 순간 생각보다 차이가 크게 나지 않거나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보니 종반에서도 시간을 많이 쓸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시간을 최대한 써가면서 수 읽기를 하려고 했고 제한 시간을 10초 정도 남기고 대국을 마쳤다. 끝내기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상대에서도 실착이 나왔고 23-41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
초반에 크게 당황할 정도로 불리하다는 생각을 했고 시간을 많이 썼는데 대국 이후 분석 결과는 내 생각과 달랐다. 초반에 비등비등하거나 내가 유리했으며, 중반 이후에 내 악수로 무승부가 될 수 있는 상황까지 갔지만 상호 최선 진행 시 내가 패배하는 경우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내가 대국에서 할 일은 충분히 수행했다.
대국 이후 그 분은 우변을 내준 것이 패인이라는 코멘트를 남겼고 나는 너무 지쳐서 그 말에 수긍만 하고 더 길게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뒷풀이에서 그 분은 자기도 오델로 프로그램으로 분석하고 공부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오델로를 진지하게 공부하게 되면 프로그램으로 자기 수를 평가하는 과정을 무조건 거치게 되는데 그런 과정 없이 5단까지 올라갔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분과 오델로로 좀 더 깊게 소통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 분께서 오델로 대회를 꽤 오랜만에 나오신 것이라고 하셨다. 오델로라는 게임이 우리나라에서 많이 알려진 게임이 아니다보니 오델로를 즐긴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동질감이 생기고 대회를 참가하다보면 저절로 유대감이 생기게 된다. 판을 만져가면서 오델로를 두는 그 분의 열정과 실력에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도 계속 오델로계에서 함께 교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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