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 점심을 먹고 친구를 고향으로 내려갔다. 지하철 역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그 친구와 같이 봤던 공연 때문에 평소 자주 가는 단골 카페를 갔다. 자취 생활 7년 차의 공허한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공간이다. 평상시에는 카페에 들어가서 볶아둔 콩을 한 번 훑어보며 인사말을 나누지만 오늘은 달랐다.
"사장님, 어제 론 브랜튼 공연 팜플렛에 사장님 얼굴이 나와있는데 어떻게 된 건가요?"
공연 때 카페 사장님의 누님을 프론트에서 뵙고, 공연 책자에 나온 것이 궁금하여 발길을 향한 것이었다. 예전에 그 쪽으로 일한 적이 있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 커피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이 곳은 커피 두 세 잔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늑한 공간이다. 하지만 요 근래 커피를 자주 마시다보니 속 쓰리는 일이 잦고 수면에도 지장이 있는 것 같아 왠만하면 하루 한 잔을 넘게 커피를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러다보니 대화도 짧아지고 카페에 있는 시간이 짧아질 수 밖에 없다.
일상 이야기를 간단히 하면서 가볍게 리버시워 한 두 판을 하니 벌써 커피 잔은 비어있었다. 나와 사장님 사이에 빈 잔을 두고 있기 무안하여 원두를 사고 자리를 떴다. 집에 도착하여 침대에 누웠으나 해는 중천이었다. 낮잠을 자면 밤잠을 설치기에 평상시처럼 리버시워를 켰다.
휴식 시간를 오델로가 차지한 건 대학 시절부터였다. 다른 게임에 크게 흥미를 못 느끼다보니 할 것이 없으면 핸드폰에서 리버시 달인이나 리버시워를 켜게되었다. 저녁 먹기 전까지 가벼운 마음으로 게임을 시작하였다. 오랜만에 마음이 훈훈해져서 그런지 오후 시간 서향의 창으로 따스한 햇빛이 비쳐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평소보다 편한 마음으로 판을 바라볼 수 있었다.
기록을 찾아보니 10월 대회 직후 10월 25일에 리버시워 레이팅 1800을 넘기고 1760 ~ 1820 사이를 왔다갔다 하기를 반복하였다. 이 때를 회상해보면 확실히 오프라인 대국에서 수가 잘 보인다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던 때였다. 판 크기 차이인지 시간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온라인에서는 수가 급하게 나가는 경우나 전체를 다 보지 못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대국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루에 두는 판 수를 줄이기도 하였으나 애매한 실력에 불만만 계속 쌓였다. 요 근래는 그냥 닥치는 대로 두다가 계속 지면 풀에 죽어 그만두게 되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말로는 레이팅에 연연하지 말고, 실력이 되면 레이팅은 따라오게 되있다고는 했지만 불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왜 잡 생각이 드는지, 왜 수가 잘 읽히지 않는지 이유를 찾고 싶어졌다. 그러다보니 침대에 머리를 세게 박은 일, 스크린 야구장에서 배트를 휘돌리다가 머리를 친 일 등 머리 다친 일까지 끄집어 생각해낼 정도로 신경을 쓰게 되었다. (영구 님께서 밤거리 조심하고 화이바 쓰고 댕기라는 말까지 생각났다.) 그러다보니 저절로 징크스에 신경을 쓰는 운동 선수들의 심리도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이런 생각이 반복되다보니 복기만 열심히 하자는 생각 반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어떻게 되겄지라는 생각 절반으로 리버시워를 쉴 때마다 했다. 그 날도 비슷한 생각으로 침대에 누워 지칠 때까지 오델로나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오늘도 비슷하게 몇 판 이기다 몇 판 지고를 반복하겠지라 생각하였으나 이상하게 연승은 길고 연패는 짧았다.
연승이 계속되다보면 묘한 불안감이 생기게 된다. 연속 경기 안타 같은 기록이 계속 이어지다보면 선수 심리와 경기 능력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지만 평소보다 생각이 깔끔해졌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묘하게 연승이 계속 되고 추후 진행이 판 위에서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눈에 잘 들어왔다.
스스로 컨디션이 좋다고 느낄 날이 많지는 않으니 모처럼 잘 될 때 몰아서 하자는 생각으로 저녁도 거르면서 계속 리버시 워를 했다. 크리스마스 날 오후, 많은 사람들이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시간에 집에 있기는 했지만 오델로가 잘 된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나이 25. 산타를 믿을 나이도, 선물을 받을 나이도 훌쩍 지나가버렸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듯한 하루였다.
좋은 기세는 해가 지고 나서도 계속 이어졌다. 평상시 일찍 자는 편이지만 졸린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중간에 연패가 잠깐 있기는 하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판이 잘 풀려나가는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복기를 하다보니 운이 따라준 판도 평소보다 많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최고 레이팅 갱신만 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서서히 1900에 가까워졌다.
이 때부터 심리적 동요가 조금씩 시작되었다. 레이팅 1900 이상인 상태에서 5연승을 하면 리버시워 3단으로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실수에 힘입어 1900을 넘기는 하였으나 4연승인 상황에서 5분 게임 버튼을 눌렀다. 레이팅 1900 초반에 13급인 상대와 매칭이 되었다. 레이팅에 비해 단급이 낮다는 것은 레이팅이 과소평가 되었을 수도 있고 리버시워를 시작한지는 얼마 안됐지만 원래 실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긴장이 되었다.
흑 15까지는 Rose-birdie/Rose-Tamenori 이후 최선 진행이었으나 백 16은 +0 차선 진행이었고 예전에 이 수에 대해 응수를 잘못한 기억을 되살리며 흑 17 C2라는 최선으로 응수하였다. 흑 21수까지는 대립하는 형세를 유지하고 있다가 백 22로 흑의 진영에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이 수로 F6를 방어하기는 어려웠으나 흑 23 D1으로 바로 응수해야 되는 상황을 만들고 백은 24수 E1으로 대립을 유지시켰다.
Rose 오프닝의 경우에는 중반 이후에 최선 진행을 찾지 못하면 수치 상으로 크게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았다. 흑 25는 -6 차선으로 최선은 B2였다. 하지만 X 스퀘어를 바로 찌르기에 수순이 생각나지 않아 무난한 진행을 택하였으나 차이가 크게 존재하였다. 백은 이후 28수로 B1부터 G1까지 균형 변을 만들고 흑이 우측의 백의 벽을 뚫어야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다만 백 28수는 최선은 아니었으며 흑이 B1 착수에 영향을 줄 방법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F6로 화이트라인의 네 개 돌을 백으로 바꾸고 그 이후에 B1으로 진행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흑 29수 A4는 백의 우측 벽을 최대한 늦게 들어가고 싶은 생각에 선택하였으나 백 30수 A2로 좌측에 착수 가능한 지점을 없애버리는 악수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흑 31수 F6는 F열을 따라 흑의 벽을 형성하여 백이 뚫고 나올 수 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한 수였다. 그 이후 흑 33수 G3로 끼워넣기를 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을 만들려고 하였고 백 34수 H3로 우상에 세 칸의 공간이 생겼다. 이에 블랙 라인을 점유하기 위해 35수로 G2를 선택하였다.
백은 36수로 F7을 택하였는데 C라인이 뒤집어져서 흑 돌이 백의 내부에 들어가있는 모양을 형성하였으나 특별히 수가 늘어나거나 유리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 때 최선수는 B5로 흑이 6행을 따라 벽을 만들수 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어 불리한 상황이 유지가 된다. 흑 37수는 조용한 수를 만들려고 C6를 택하였고 백 38수 B5로 언뜻보면 유리하지만 교묘하게 끼어넣기를 하기 어려우며 행이나 열 전체를 백에게 내주면서 불리한 곳으로 몰릴 수 있는 상태였다. 일단 변 쪽에 안착하기 위해 39수 H4에 이은 41수 F8을 택하였다.
이 이후에는 엔딩이 잘 그려지지 않기도 하였고 시간 문제로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착수하였다. 흑 43수 E8은 백 44수 D7으로 백에게 H3에서 D7까지의 라인을 내주면서 운신의 폭을 좁히는 선택이었고 A7에 끼어넣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려고 흑 45수 C7을 택하였다. (이 때 흑이 D8으로 갔으면 백이 수를 줄이면서 불리한 곳으로 유도가 가능하였다.)
이어지는 백 B8에 흑은 D8밖에 선택지가 없었으며 이후 백이 H1 코너를 차지하였을 때 흑은 백이 만든 빈 공간인 H2를 차지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여기서 백이 H1을 차지하는 것은 +2의 유리함을 잃는 -2의 차선으로 패리티 측면에서는 백이 B7을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좌하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흑이 A6로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여유수를 하나 더 얻는 효과도 있다.
백 50수 A6 이후에는 좌하와 우하 중 어디를 먼저 들어가느냐가 관건이었는데 우하를 먼저 들어가면 백에게 굳힘돌을 많이 내줘 불리해진다는 판단을 하였다. 흑 51수로 B7을 택하면서 백이 A8 코너를 먹어도 A7으로 끼어넣고 그 다음 A1과 B2라는 여유수를 착수할 생각을 하였다. 다만 백이 56수로 G8에 착수한 이후에 B2 대신 G6를 먼저 착수하였고 백의 패스가 발생하면서 35-29로 게임이 마무리 되었다.
이 게임에서 이기면서 1900 이상인 상태에서 5연승을 하고 리버시워 3단으로 올라갔다. 12시가 거의 다 됐을 무렵이었다. 오델로 잘 되는 것도 기쁜 선물이었는데 3단이라는 성과는 산타의 정체를 모르던 시절 선물을 받았을 때의 기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주었다. 오델로 자체도 재미있지만 성과가 따르면 재미와 의욕은 배가 되는 법이다.
노력하는 만큼 성과가 따르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 오델로는 노력한 것이 어느 정도 쌓인 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성과가 나타나는 것 같다. 오델로 한 판에 일반적으로 30번의 착수를 하게 되고 그 착수가 모여 결과를 만들게 된다. 모든 착수를 최선으로만 갈 수는 없다. 그래서 한 수만 제대로 뒀다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내가 잘 둬서 이긴 것이 아니라 상대의 실수로 이겼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악수 대신 좋은 수로 가고, 차선이나 차차선 대신 최선으로 가기 위해서는 요령이나 지식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수에 대한 깊은 고민이 같이 따라줘야 되며 이는 대국 한 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이따금 관성적으로 택하는 수를 둘 때마다 생각이 나게 되는 것 같다. 가끔씩 깊게 생각하여 발견하게 된 기발한 수가 모여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보이면 그 때 훌쩍 자라버린 실력을 체감하게 될 것 같다.
다만 올라갈수록 넘어야 될 턱이 높아지고 수읽기가 더 촘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실력이 늘어나지 않는 것에 답답함을 느낄 때에는 게임 레벨 업 시스템처럼 경험치 게이지가 어느정도 찼는지 보고 싶은 정도이다. 아니면 크리스마스에 어른이에게 찾아온 생각하지 못한 선물처럼 특별한 날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도 희망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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