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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막 커튼은 차디찬 바람을 막아줬지만 일요일 오전의 포근한 햇살을 가리고 있었다. 해는 이미 중천이었으나 나는 어두운 방에서 눈을 떴다. 대충 옷을 걸치고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차가운 공기가 옷 소매 사이로 들어가 내 몸을 흔들어댔다. 큰 길가에는 세련되고 깔끔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일요일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 바쁜 흐름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는 순대국을 먹으러 가며 하루를 시작했다.

늦게 시작한 하루는 물 위의 기름처럼 둥둥 떠다녔다. 다들 누군가와 또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바닷가에 말려지는 피대기처럼 늘어지고 있었다. 정처 없이 동네 주변을 돌다 발길이 멈춘 곳은 단골 커피집이었다. 요 근래 2, 30대들이 자주 찾는 골목 근처에 있는 카페지만 젊은 감성이 배어있는 디자인이 아닌 따스한 햇살의 주황빛이 어울리는 공간이다. 하얀 벽돌 무늬의 벽은 햇살을 머금어서 그런지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노르스름한 느낌으로 온기를 주며 목재의 테이블과 기둥, 바 자리는 부드러움을 한 층 더해주고 있다. 그리고 따뜻한 분위기 곳곳에 로스터기, 커피 관련 서적과 물품이 정신 없는 회사원의 책상처럼 숨어 있는 모습은 한 사람의 일생이 녹아 들어가있는 것 같다. 카페의 따스한 분위기 때문에 누군가와 오델로 판을 펼치고 한 두 시간 정도 대국을 계속 두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기도 한다.

카페에는 사장님 혼자 계셨다. 여느 때처럼 사장님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바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께서는 인사와 함께 커피 적시는 시간에 따른 맛 차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시음을 권하였다. 카페 사장님은 커피 이야기를 할 때면 호기심을 채운 아이처럼 눈이 반짝이며 밝은 기운과 커피에 대한 열정을 듣는 사람에게 전달해주며 나는 그 느낌을 받고자 그 분을 마주 보며 커피를 마시게 된다. 시음에 이어 커피 한 잔과 함께 커피 향이 어떠니, 드립을 어떻게 해야되니, 건물 어디가 이상이 있다니 등 이야기를 하다보니 잔이 바닥을 드러냈다. 모든 음료와 음식을 빨리 먹는 나의 습관이 여지 없이 드러났다. 최근 활력이 없고 멍해 있는 시간이 길다보니 한 편에 존재하던 답답한 마음이 섬세한 드립 커피를 들이키게 만드는 것 같았다.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최저점을 찍고 있다보니 오델로 역시 잘 안되고 있었다. 머리 속으로는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으나 실제로 두고 나서 보면 섣부른 판단과 집중력 부재의 연속이었다. 초반에 잘못 둔 판은 불리한 기세를 타고 휩쓸려 내려가버리고, 중반까지 비등비등하거나 유리하게 가더라도 어느 순간 발을 잘못 디뎌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버렸다. 복기를 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실수한 순간에 대한 자책과 원망만 남았다. 아는 분이나 고수 분들과 둘 때에는 걸레에 남아있는 물방울 하나까지 짜버리겠다는 심정으로 뇌를 쥐어짜는 느낌으로 대국을 하였지만 그 이후 녹초가 되기 십상이었다.

한 판 이기고 세 판 지는 일상이 반복되다보니 내 착수 하나 하나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부담감과 공포심은 오랜만인것 같았다. 예전에 암벽 등반을 할 때에는 발 놓을 곳, 손 둘 곳, 체력 셋 중 하나만 만족스럽지 않아도 온 몸이 굳어버리곤 하였다. 그 때 고개를 돌려 뒤를 보는 순간 올라온 높이가 보이고 서울 시내가 눈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아무리 줄에 묶여있는 몸이라고 하더라도 1~2 m 떨어진다는 것은 나에게 큰 벽이었다. 비슷한 경험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라운드 서킷 트레킹 때도 있었다. '토롱 라'라는 코스 최고점을 가는 날에는 해가 뜨지 않은 새벽 2~3시 경부터 출발하였는데 사람 두 명이 나란히 서기도 빠듯한 길에 양 옆은 평지가 보이지 않는 경사였다. 한 겨울 가는 길의 절반은 얼어있어 잘못 딛으면 어둠 속 비탈길을 따라 사라지는 모습이 머리 속에 계속 그려졌다. 산행 중의 두려움, 그리고 벌벌 떨면서 내딛는 한 걸음이 최근 나에게 오델로와 착수가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첫 잔을 다 마실 때 쯤 손님들이 오기 시작하였고 일어날까 말까 고민하다 사장님이 커피를 내리는 것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사장님께서는 다른 손님의 커피를 내리면서 드립 커피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그 중 칼리타 드립퍼와 고노 드립퍼에 대한 차이 이야기도 있었다. 전자는 사다리꼴 모양에 구멍이 3개이고 후자는 원뿔 모양에 구멍이 1개여서 물의 체류 시간과 추출 정도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어느 순간 사장님께서 칼리타가 아닌 고노 드립퍼로 추출을 시작하며 시간이 없는 관계로 점 드립은 못해주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나중에는 고노와 칼리타를 둘 다 쓰기 시작하였는데 어느 순간 커피가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분쇄된 원두를 담고 물을 조금 부어 커피를 적시는데 물 붓고 시간이 지나 필터가 조금씩 젖어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칼리타를 쓸 때에는 물을 세 번에 나눠 부으셨는데 필터가 젖기 시작한 시점부터 원두에 물을 붓는 모습과 추출구로 커피가 떨어지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다.

드립 커피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심자지만, 드립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원두 분쇄도, 물 줄기의 굵기, 추출 시간 등이 결정한다는 원론적인 말은 이 글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 일련의 과정에 집중하며 쳐다보니 드립 커피 내리듯 오델로를 두고 싶어졌다. 초심자인 나도 물 줄기가 두꺼운지 아닌지, 천천히 추출되는지 느리게 추출되는지 신경을 쓰게 되어있다. 그 일련의 과정을 고려하여 결과물을 얻어내는 것처럼 내 머리속에 물줄기를 흘려 적당한 수읽기를 한 후 커피 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것처럼 수를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카페에 도착한 순간부터 사장님 이야기가 잦아들 때 오델로를 한 판 씩 뒀는데 결과는 그리 좋지 못하였다. 하지만 내 머리 속으로 드립 커피를 내리듯 오델로를 두겠다는 생각을 하니 심란한 마음이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그 이후 거짓말처럼 두 판을 이겼다. 그 이후에는 결과가 좋지 못하였는데 집중력이 소진된건지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다. 사장님께서 다른 손님들 커피를 내리면서 조금 남은 커피를 계속 주셨고, 평소보다 커피를 많이 마시게 되었다. 원두를 사서 돌아오는 길은 카페로 향하던 발걸음보다는 가볍게 걸어온 것 같다.

저녁을 먹은 후 집 정리를 하고 나니 체력, 감정, 집중력을 많이 썼다는 것을 직감하였으나 습관처럼 스마트폰으로 오델로를 두기 시작하였다. 이 때는 거의 반쯤은 아무 감정 없이 충분히 생각하며 둔거 같다. 카페 사장님께서 오늘 처음 나에게 했던 이야기는 커피를 내리기 전 적시는 시간을 30초에서 1분으로 늘였더니 커피의 산미가 더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오프닝 아는 구간을 지나고 머리 속으로 모든 곳에 다 한 번씩 둬보려고 했다.

그 결과, 내가 내린 한 잔의 드립 커피와 같은 기보가 나왔다. 내 드립 커피는 단골 카페의 깔끔하고 상큼한 맛을 따라가지는 못하고, 커피의 좋은 향미를 다 끌어내지 못하며 씁쓸한 잡향이 같이 추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후의 식곤증을 쫓아내면서 하루를 다시 시작하는 원동력과 만족감을 준다. 비록 복기하며 아쉬운 점을 발견하게 되지만 두고 난 이후 깔끔한 느낌이 든 것이 꼭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신 것 같다. 커피를 내릴 때 언제까지 내릴지 고민을 하고 멈출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둔 두 판도 특히나 엔딩에 아쉬운 점이 존재하였다.

 

(흑을 뒀던 판)


(백을 뒀던 판)

커피를 취미로 입문한 후, 분쇄된 원두에서 나는 향기를 맡는 과정, 커피를 만들면서 맛을 상상하는 과정, 실제로 맛을 보는 과정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하루에 한 번은 꼭 커피를 만들게 되고 점차 맛에 대한 만족 역시 증가하고 있다. 최근 내 드립 커피에 어느 정도 만족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내 오델로 실력도 향상하는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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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오델로를 소재로 한 일기 또는 수필을 꾸준히 쓰려고 합니다. 아직 10월 수원 대회 후기도 다 못 썼는데 이런걸 쓰는군요. 관심 있게 읽어주실 분이 얼마나 많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오델로를 모르시는 분은 제 일상과 감정을, 오델로를 아시는 분은 오델로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중에 제가 이 글을 보고 추억을 회상하거나 복기 또는 반성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고요.

글을 쓰고 싶은 욕구를 불러 일으켜주신 볼짱 님과 기보 추가를 위한 툴을 올려주신 그린 님께 감사드립니다. 잠이 안 오는 날 그 날의 기분에 맞는 판을 같이 곁들여 글을 써보겠습니다. 판에 대한 해설은 추가하고 싶을 때 쓰겠습니다. 글 실력과 오델로 실력이 많이 부족하지만 너그럽게 이해하고 읽어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

추가로 두 판 모두 34로 이겼군요. 수원 대회 때 34-30으로 졌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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