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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편 EGP Rome 1편 / 2편


4라운드 상대는 이탈리아의 Alessandro Tucci였고 백번이었다. 4, 5라운드에서 집중이 떨어지는 경험을 많이 하여 경계를 하면서 시작을 했는데 내 인생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 본격적으로 대회 나가려고 준비를 시작했던 오델로를 잠깐 했던 먼 미래를 더듬어봐도 이보다 더 나쁜 결과의 대국은 없었던 것 같다.



오프닝은 No-Kung이었고 상대 흑은 바로 -2인 9수 D6로 틀어버렸다. 17수까지 서로 무난하게 최선으로 진행하였고, 18수에서 백이 최선 D8 대신 +0인 차선 E7을 뒀다. 다음 20수에서 백은 A5를 갔는데, 우측에 착수하면 F5가 백으로 바뀌면서 흑이 D3로 쉽게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여 선택한 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악수였다. 백 22수 C2 역시 악수였다. 22수에서 최선인 G4와 비교했을 때 C2는 상변 쪽에 흑의 수를 늘여주는 느낌을 준다. 24수 상황에서는 성급하게 D8으로 뚫고 들어갔으나 최선은 백이 G4를 두고 흑이 F7에 백 A2로 진행된다. 집중이 많이 떨어졌는지 악수를 연발하기 시작했다. X라인을 의식하고 백 26수 A2를 택한 것 역시 오판이었다.

악수의 최고 절정은 34수였고 내 스스로 대국에 사망 선고를 내려버렸다. 그 때 당시를 회고해보면 X에 둘지 말지를 잠깐 고민을 하다가 지금 X를 두나 D1을 두고 X를 두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도대체 왜 이런 착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때는 A3를 둘 수 있다고 생각하여 끼워넣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상대가 흑 35수 B1으로 응수하자 내가 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큰 혼란에 빠졌고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악수(38수 B8, 42수 G6)를 계속 남발하면서 일방적으로 끌려다녔다. 판의 절반 이상이 흑돌이 되자 퍼펙트 패배가 보이면서 아연질색이 됐다. 하지만 상대의 흑 54수 G7으로 대국은 55-4라는 일방적인 스코어로 끝나버렸다.


형세가 일찌감치 기울어져서 다른 대국보다 내 대국이 일찍 끝났다. 상대는 나에게 빈 칸이 있는 경우 점수를 어떻게 기록하냐고 물었다. 빈 칸은 이긴 사람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심각한 차이로 지면서 멍한 상태로 시맥스로 복기를 했고, 상대는 다른 판을 보다가 내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그 때 마침 결정적인 패착 34수를 두던 때였고 상대는 그 부분을 지적하면서 저 수로 승부가 쉬워졌다고 했다. 그 이후로는 복기할 필요가 없기에 자리를 떴다. 이전까지는 오델로 기사 단톡방에 스코어까지 이야기를 했는데 크게 패했다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대회장에 와이파이가 없고 데이터도 잘 터지지 않아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쓰려면 대회장 밖으로 나가야 했다. 보통 대회장 밖에 나가면 바깥 공기 쐬고 대회장 안에서 느낀 더위가 가시면 바로 들어갔는데 4라운드 끝난 이후에는 그러지 못하였다. 내 결정적인 실착이 계속 머리 속에 남았고 내 실력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회가 더욱 더 어렵고 빡빡하게 느껴졌다. 이런저런 생각하다가, 이 판 때문에 승수가 같은 사람 중에서 순위는 낮게 책정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회장으로 들어갔다.


4, 5라운드 중 1승을 하고 싶었기에 5라운드 상대가 더 궁금해졌다. 5라운드 대진표가 잘 보이지 않아 모니터 근처로 가니 운영진 중 한 명인 Leonardo Caviola가 그 모습을 보고 "Where's Kim?"이라고 하면서 내 상대가 누군지를 찾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는 멀리 있지 않았다. 자신이 5라운드 상대라는 것을 보자 "It's me!" 하면서 밝은 웃음으로 이야기를 해줬다. 그가 대회 전반적인 운영을 담당하고 있어서 내가 먼저 지하로 내려갔고 다른 대국들이 시작하고 나서 그가 내려왔다.



내가 흑번이었고 상대는 백 8수 C6, Ralle로 진행을 하였다. 그는 바로 -2인 백 10수 C2로 틀었으나 이 오프닝은 나카지마 테츠야 八단에게 호되게 당한 오프닝으로 어느 정도 살펴본 적이 있었다. 균형이 흔들린건 상대 백의 14수 G4가 시작점이었다. 그 이후 흑이 좌하쪽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착수하면 백이 둘 곳이 사라진다고 판단했다. 이후 백은 26수 E1, 30수 B1으로 형세가 흑에게 많이 기울어졌다. 상대의 심각한 표정과 반응이 눈에 띄였고 백 34수 때 쯤에는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 대역전극은 서서히 시작하고 있었다.

우선 1차 과실은 B2를 놓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흑 35, 37, 39수에서 B2가 최선이었는데 모두 다른 수를 택하였다. 우하 쪽에서 상대가 둘 수 있는 곳을 없애고 B2로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좌상 세 칸을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B2를 41수로 뒀는데 이 때는 반대로 G2가 최선이었다. 흑이 차지하고 있는 화이트라인에는 흑만 이미 있기에 반대쪽 블랙 라인 대각을 차지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수를 놓치면서 다음 백 42수 B7으로 백에게 블랙 라인을 내주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 때부터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 때 나는 화이트라인을 차지하고 있는 점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흑 F8, 백 G8 이후 흑 G7으로 둘 생각을 했다. 비록 우하 3칸에 백이 먼저 들어가기에 G7은 백이 되고 A1을 공격당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내줘야 되는 상황으로 봤다. 하지만 최선은 +12인 H3로 그 이후 백 H4, 흑 F8, 백 G8, 흑 G7으로 진행되며 이 때에는 백이 화이트라인을 자를 방법이 없어진다. 또 차선인 +10 G8도 있었으며 내가 선택한 F8은 +8인 차차선이었다. 또 45수의 G7는 수치상 +2로 최선이 아니었다. 최선은 H7으로 이후 백 H6, 흑 A8, 백 H8, 흑 A7으로 진행되며 백에게 H8과 하변을 내주는 대신 G7의 빈칸을 만들어 패리티를 뺏는 진행으로 이어진다.

이 때부터는 이후 전개를 정확하게 상상해야되는데 내가 착수한 이후 상황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49수에서 내 실착이 나왔다. A8 대신 H4를 간 것이다. 그 때 당시는 백이 A7으로 끼어드는 것이 싫어서 선택한 수 같은데 A8 이후 블랙라인을 공략하면 백이 자를 수 있는 곳은 F2나 G2밖에 없다. 흑이 H4를 두면서 블랙라인의 돌을 얻는 기회를 잃게 되었다. 흑 51수 F2도 -6짜리 차선으로 최선은 G2였다. 하지만 백이 바로 52수에서 최선인 G1과 H2 대신 차선인 -4 H3를 두면서 대국은 30-34로 충격적인 역전패로 끝났다.


돌을 계속 세 봐도 30이라는 숫자가 변함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마음 속이 참담해졌다. 분명히 다 잡은 대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안일한 마음에 승부를 내줬기 때문이다. 심각했던 표정의 상대가 밝은 미소로 어려운 게임이었다고 했을 때 그냥 "Yes. It was tough"라고 대답했지만 대국 이후 나 자신에게 느끼는 화가 삭지 않은 것은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분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이 있었다. 집중력이 극도로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평상 시에는 지금 상대가 두고 싶은 곳과 방어가 가능한지 여부, 내가 어딘가를 둔 이후 상대의 대응, 엔딩에서의 수의 진행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면 4라운드 정도부터는 내 착수 이후의 모양만 생각이 나고 그 이상의 수 읽기가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걱정이 앞설 수 밖에 없었다.


6라운드 상대는 Maria Serena Vecchi로 대회 이후 저녁 식사 때 이탈리아어를 못하는 나에게 도움을 많이 주신 분이었다. 이 때, 나는 백번이었다. 흑 7수 D3를 두며 Inoue로 진행했고, 개인적으로 Iago보다 또 다른 최선인 C2로 두는 것을 선호하여 그 쪽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대국을 진행하면서 백 10수 C6나 백 20수 A5 등을 두면서 생각대로 대국이 풀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20수를 두고 상황을 매우 좋지 않게 평가했는데 수치 상으로는 -6 정도였다. 그러나 상대도 빈틈을 보이면서 -8 ~ +8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대국이 진행하다가 35수부터는 +2의 미세한 형세로 대국이 진행되었다. 

+2의 미세한 리드는 44수에서 최선수인 백 H1 대신 -2였던 F8을 두면서 역전당하는 듯 했다. 그러나 상대 흑의 45수 C8으로 팽팽했던 균형은 백 쪽으로 치우쳐졌다. 나는 C6를 백으로 바꾼 이후 H1을 공략하겠다는 생각으로 +14인 E8을 뒀으나 최선은 +22인 D8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여기에서 47수로 B7이라는 악수를 두고 바로 백 48수 B1으로 끼워넣기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했다. 이후 서로 최선수가 아닌 수를 두기는 하였으나 11-53의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어느덧 1일차의 마지막 대국인 7라운드가 찾아왔다. 막바지가 되니 체력이 방전되어서 그런지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다만 내가 초반에 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이 때는 스스로 Othello quest에서 레이팅 1700 ~ 1800대 정도의 실력이라고 느껴졌다. 다음 라운드 상대는 Fabrizio Lai로 인심이 좋아보이는 중년의 남성 분이셨다. 그는 대국 전에 한국에도 Lai라는 이름이 있냐고 물어봤다. 없다고 하니 중국에는 자기랑 같은 이름이 있다고 해서 물어봤다고 했다. 이 판은 내가 흑번이었다.


상대 백은 대각으로 나왔고 Buffalo로 응수를 하니 1라운드와 같이 상대는 흑 6수 E6로 두면서 Hokuriku buffalo로 대응을 했다. 흑 11수 D6는 -2였으나 내가 주로 가는 최선 C5보다 게임을 풀어가기는 쉽다고 느꼈다. 조금씩 상대가 차선으로 가면서 나한테 미세하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가 백 22수 B4에서 격차가 벌어졌다. 이 수로 C5와 G3라는 조용한 수가 생겼으며 반대로 백은 이후 착수에서 외각에 돌이 많이 생기면서 불리해지는 상황이었다. 백 24수 F1와 백 26수 B5를 보며 흑돌을 좌하 쪽으로 몰면 유리하겠다는 판단을 했다. 결정적으로 백 36수 C8은 -26에서 -42로 떨어지는 큰 악수로 이 때 최선 진행은 백 E8, 흑 D8, 백 B7, 흑 A7, 백 C8으로 흑이 이후 좌하쪽에 들어가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흑 43수를 기점으로 흑의 뒷심 부족이 나타났다. 43수를 둘 상황에서 최선은 H5로 이후 백은 선택지가 없어서 백 H4, 흑 H8, 백 G6, 흑 H7면 게임은 크게 이길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간 쌓아온 유리함을 깎아먹는 +20인 G3를 택해버렸다. 다음 수에서도 또 사고를 쳤는데 45수를 둘 상황에서는 2행과 G3 ~ G5가 백인 것을 이용하여 G2를 두는 것이 최선이었는데 그냥 H8을 둬 버렸고 +8로 격차는 크게 좁혀졌다. 상대가 다음 수에 백 G6를 두니 H7를 두기 위해 X라인을 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을 파악했다. 상대는 여기에 최선이 아닌 -16짜리 B7을 뒀지만 흑의 악수가 또 나왔다. 최선인 H5, 차선인 +14 G2 대신 H2를 택한 것이었다. H7에 끼워넣는 것을 의식한 것이었는데 흑 H5, 백 H7으로 두면 7행이 모두 백으로 바뀌어 나중에 A7을 두기 수월해진다. 상대 백도 50수에 -18짜리 G2라는 수를 뒀으나 55수에서 7행을 비우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최선 H5를 놓치고 +8인 B1을 뒀으며, 시간이 부족한 탓에 돌 셀 시간이 없어 57수 역시 +4 차선인 A8을 두면서 대국은 34-30으로 겨우 이길 수 있었다. 게임을 마치고 상대가 악수를 청하였는데, 상대의 손에서 강인함을 엿볼 수 있는 힘이 느껴졌다. 게임이 어려웠고 잘 싸웠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이렇게 첫째날을 4승 3패라는 성적으로 마쳤다. 개인적으로는 4라운드에서의 큰 삽질과 5라운드에서의 패배가 뼈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5라운드를 이겼다면 더 어려운 상대를 만났을것이니 5라운드에서 이겼다고 하더라도 5승 2패로 끝낼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1등과 2등은 역시 일본 선수의 차지였다. 나는 4승을 하였지만 4라운드의 여파가 커서 그런지 1일차가 끝난 시점에서 19위였다. 사람 수가 많다보니 1승의 차이를 줄이는 것과 순위 하나 올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감하게 되었다. 



다른 대회 때보다 체력 소진이 더 심하게 느껴졌다. 대회 끝난 직후에는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지 뒷목이 땡기기까지 했다. 그래서 저녁 같이 먹을거냐는 질문에도 처음에는 그냥 안 먹겠다고 했다. 하지만 전 세계 오델로 선수들과 같이 밥 먹을 기회가 언제 또 오겠나 싶어서 숙소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일행과 합류했다. 아무래도 이탈리아 선수가 대다수여서 대부분 대화가 이탈리아어였고 다른 나라 선수들은 두 세 명씩 대화를 나누거나 자기 앞의 음료와 식사에 집중하였다. 명실상부한 현재 세계 최고의 오델로 선수인 타카나시 유스케 九단은 어디에서나 인기가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대국을 신청했고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계속 스마트폰으로 오델로를 두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대회 중반에 나에게 "안녕하세요"라고 하며 한국말로 인사를 했던 이탈리아 선수가 있었다. 저녁 식사 때 근처에 앉아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아내 되시는 분이 한국 사람이여서 한국말을 배웠다고 한다. 말할 사람을 못 찾던 와중에 한국이라는 공통점으로 이야기 할 수 있어서 외로움이 덜어졌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본인이 한글을 배울 때 사극 보는 것을 좋아해서 쓸모 없는 표현을 몇 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송구하옵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같은 말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면서 그런 표현은 요즘 한국 사람들도 잘 안 쓰는 표현이라고 했다.


해가 늦게 져서 그런지 꽤 늦은 시간에 식당에 들어갔는데도 날이 밝았았고,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가 되니 그 때서야 어두워졌다. 차를 대회장 근처에 주차한 일행과 함께 숙소로 돌아오니 유럽 대회를 참가하고 있는 경험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새로운 오델로 선수를 만나는 건 나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내 실착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4승 3패라는 성적 역시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2일차에는 경기가 4판이 있고 2승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여러 감정이 섞여 복잡미묘했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요 며칠 쌓여있는 피로에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서 뻗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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