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회의 신 카이로스는 독특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 머리 뒷편에는 머리카락이 없고 발 뒤에는 날개가 있어서 빠르게 날아간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사람들이 기회의 신을 뒤늦게 붙잡으려고 해도 뒷통수에 머리카락이 없어서 붙잡을 수가 없고 사라져버린다. 이 이야기처럼 기회가 왔을 때 고민하다가 나중에 잡으려고 하면 손에 쥔 모래알처럼 사라지기에 기회가 눈 앞에 나타나면 잽싸게 손아귀에 넣어야 한다. 최근, 단조로운 일상 속에 갑자기 기회가 나타나면서 생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일에 바빠 정신 없던 때였다. 문득 세계 대회 일정이 궁금하여 세계 오델로 연맹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작년 세계 대회 직후 올해 대회 일정에 대한 글이 올라왔는데 바로 사라지는 바람에 일정이 확정됐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평소에 자세히 보지 않는 홈페이지를 이곳 저곳 찾아보다가 Tournaments calendar에 대회 일정이 나와있었다. EGP 일정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대회 일정도 올라와있어서 신기해하던 차에 5월에 EGP Rome(European Grand Prix Rome)이 열리는 것을 확인하였다. 갑자기 5월에 로마에서 학회가 있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 학회 홈페이지를 옆 창에 띄워보았다. EGP Rome은 5월 12, 13일, 학회는 5월 13 ~ 17일이었다. 이건 천운(天運) 그 자체였다.
(링크: http://www.fngo.it/romeegp.2018.asp)
처음에는 유럽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지 의문이 있었다. EGP 규정에는 국적을 제한하는 내용은 없었고, 비유럽권 국가 사람도 있었고 일본의 타카나시 유스케 九단와 나카지마 테츠야 八단가 초대되었지만 살짝의 의구심은 남아있었다. 처음에는 이탈리아 협회 공식 메일 주소로 보냈으나 이틀이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숙소나 항공편 예약이 시급했기 때문에 페이스북 EGP Rome 페이지를 찾았다. 관리자에게 직접 메세지를 보낼까 고민하다가 공식 페이지에 올렸더니 이탈리아 협회 담당자인 Leonardo Caviola에게서 하루 만에 참가가 가능하다는 답변이 왔다. 답변을 보고 속으로나마 쾌재를 외쳤다.
EGP는 1년 동안 유럽 내 8개 나라에서 스위스 라운드 방식의 대회를 개최하여 각 대회에 대해서도 상을 수여하고 8개 대회 누적 성적에 대해서도 시상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비유럽권 국가에서도 참가가 가능하며 일본, 중국, 홍콩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도 참가한 사람이 있었으나 한국에서는 전무하였다. 한 마디로 EGP는 한국에서는 미지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또, 아시아 지역 오델로 대회는 비교적 접근성이 편하다기에 만날 기회가 있지만 유럽 선수들은 세계 대회 이외의 대회에서 만나기 어렵기에 이 기회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EGP 출전에 대해 강남 스터디 모임 사람들에게는 미리 살짝 귀뜸을 해 뒀으나 최대한 늦게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대회 참가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으나 준비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학회 발표 준비도 해야했고, 숙소와 항공권을 알아봐야했고, 병역 관련하여 국외여행허가를 받고 여권을 발급받는 등 꼭 해야될 절차를 밟아야 내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준비를 모두 마친 다음에야 오델로 기사들이 있는 카톡방에도 EGP를 출전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한국인 최초로 EGP를 출전하는 것이여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이셨다. 특히 렘 님은 이 소식을 듣고 강남 스터디 모임에서 귀중한 조언을 많이 해 주셨다. 시간이 지나 EGP 공식 홈페이지 참가자 명단에 내가 추가되면서 EGP 이야기가 다시 카톡방에 떠올랐다. 나카지마 테츠야 八단께서 홈페이지에서 나를 보고 평소 친분이 있는 하야 님께 연락을 하셨고, 하야 님께서 오델로 기사 카톡방에 이야기를 꺼내신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카지마 테츠야 八단과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혈혈단신으로 로마에 가서 대적해야 되는 상황에서 그나마 끈이 하나 생겼다. 내가 한일전 대표로 나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하야 님을 통해서 연락하여 도움을 많이 준 것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아쉽게도 하야 님은 참가하실 생각도 하셨던 것 같은데 출장 일장이 겹치셔서 갈 수 없으신 상황이었다.
여담으로 나카지마 테츠야 八단은 내가 EGP Rome 대회를 참가할 수 있게 만든 1등 공신이다. 원래 로마 대회는 보통 1, 2월에 열리는데 나카지마 테츠야 八단이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5월에 대회를 열도록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결정된 대회 날짜가 학회 전날이라는 것은 믿기 어려운 우연이었고 마음만 같아서는 나카지마 테츠야 八단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EGP를 나간다는 것 때문에 출국 전까지 많은 지원을 받았다. 강남 스터디 모임 때 렘 님께서 EGP 전에 따로 만나자고 하셨고 대여섯판 정도 오델로를 두면서 부족한 점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높으신 기력 때문에 내 부족한 부분과 심리를 꿰뚫어 보면서 내가 보강해야 될 점을 분명하게 지적을 해주셨고 내가 수 읽기를 할 때 간과하고 있는 부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출국하러 공항에 가는 길에 하야 님께서 운서역에 들리라고 하셨고, 리치 형님, 볼짱 님, 렘 님이 직접 오셔서 저녁을 먹고 오델로를 두는 시간을 가졌다. 다들 일이 바쁘신데 멀리 인천 공항 근처까지 나와주시고 격려해주셔서 큰 힘이 되었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 운이 좋아 유럽 대회에 나가게 된건데 관심과 격려를 주셔서 감사할 뿐이다.
(초상권을 우려하여 모자이크 처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대회 준비는 순탄치 않았다. 4월 말부터 급한 일이 생기면서 4월 28일 전국 선수권 대회 준비를 거의 할 수 없었으며 4월 말이면 끝날 것이라 생각한 일이 꼬이면서 출국하러 공항에 가는 5월 3일까지 일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준비를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감각을 끌어올릴만한 여유는 없었다. 퇴근 10분 전까지 일을 마치고 집에서 짐을 들고 운서역에 도착하니 8시 15분 정도였다. 모임 장소에 도착했을 때도 나에게 과분한 자리라고 생각했다. 식사 이후 카페에서 오델로를 하였으나 많이 지쳐서 그런지 잘 되지는 않았다. 비행기는 다음날 오전 1시 15분 출발이였고 보통 공항에 4시간 정도 전에 도착하는 편이여서 10시 반 정도에 불안해하면서 공항으로 갔으나 기우였다. 수속을 마치니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고 비행기에 타서 이륙도 하기 전에 잠들었다.
아부다비 공항에서 3시간 대기 경유가 있었고 현지 시각 1시 30분 정도에 이탈리아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소매치기가 많다는 말에 계속 긴장을 하고 있었고, 숙소까지 가는데도 2시간 넘게 걸려 도착했을 때에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래도 저녁도 먹고 대회장 위치를 확인할 겸 주변을 돌아다녀봤다. 도미토리 형태의 숙소는 자거나 쉬기 불편하고 내가 코를 골아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에 비싸더라도 혼자 잘 수 있는 곳을 알아봤다. 그렇게 비교적 저렴하면서 학회장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을 찾았는데 우연히도 대회장에서 5분 거리였다. 이 역시 운이 따라줬던 것 같았다. 하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처럼 그냥 몸 하나 뉘일 공간만 있고 전반적인 시설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비행기에서 푹 자서 그런지 시차의 영향을 적게 받고 평소 자던 시간이랑 비슷하게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대회 시작은 10시 반부터였고 여유롭게 9시 45분 쯤 도착하게 대회장으로 출발하였다. 10시 시작인 공지가 있었고 10시 반이라는 공지도 있었는데 나카지마 테츠야 八단이 고맙게도 미리 이탈리아 협회 관계자에게 물어봐서 후자인 것을 확인해줬다. 대회장으로 들어가는 골목 앞에서 대회장을 못 찾고 서성이던 나카지마 테츠야 八단과 그의 사모님을 만났다. 반가움을 한껏 드러내며 인사를 한 다음 대회장으로 들어갔다. 작은 간판에 크고 짙은 갈색의 문 때문에 영업을 안 하는 곳으로 보이기까지 해서 대회장을 찾기 어려웠던 것 같았다. 하지만 대회장 안쪽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대회 장소에 대해 검색하여 보드게임 카페 같은 분위기라는 것을 알기는 하였으나 사진으로 봤을 때와 느낌은 사뭇 달랐다. 가게 양쪽 벽은 진열장에 보드게임이 가득 있었고, 한 쪽 벽에는 창문과 오락기, 다른 벽 쪽에는 바와 함께 맥주와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또한 지하에도 테이블과 방이 여러 개 있었다. 나카지마 테츠야 八단을 제외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여서 쭈뼛쭈뼛하고 있었는데 유럽권 선수들은 친절하게 나와 눈이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해 줬다. 특히 대회 관련해서 연락을 했던 Leonardo Caviola는 "Kim!"이라고 하면서 매우 환하게 반가워해줬다. 여러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다보니 살짝 긴장이 풀리는 듯 했다.
또한 말로만 듣던 선수들을 직접 보니까 감회가 새로웠다. Leader's tiger 오프닝의 Imre Leader와 EGP의 강자 Takuji Kashiwabara가 연습 대국을 하고 있었다. 오델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을 직접 보고 같은 대회를 참가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다. 하지만 세계 대회 우승 경험이 있는 Michele Borassi는 명단에는 이름이 있었으나 불참을 하였다. 대부분 선수들은 친한 사람들끼리 담소를 나누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선수 중 일부는 대회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대회장 내부가 더워서 나 혼자 멍 때리면서 가게 안밖을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푸근한 인상의 Di Mattie Alessandro가 나를 부르면서 연습 대국을 신청하였다. 이전에 통성명을 하지 않았는데 먼저 찾아와서 연습을 하자고 하는 것이 매우 감동적이었다. 오델로라는 공통 주제만으로 서로 반가워할 수 있고 친해진다는 것이 외국 오델로 선수를 만날 때의 즐거움인 것 같다. 대회 전 무리하지 말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국을 임하였는데 상대의 기력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어느 순간 숨통이 탁 막혀버렸으나 Di Mattie Alessandro가 대회 준비 때문에 자리를 비워야해서 상대가 바뀌었고, 상대의 실수를 붙잡고 그 판을 이길 수 있었다. 대국을 마치고 등록을 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Paolo Scognamiglio가 연습 대국을 하자고 했고 어찌저찌 그 판도 이기게 되었다. 그 사이에 등록이 마감되었고 Leonardo Caviola가 친절하게 대국 중인 나를 찾아와 기보 기록지를 주고 40 유로의 대회 참가비를 받아갔다. 특히 기보 기록지가 책자 형태로 되어있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대회장 지도와 기보 기록지, 메모지가 같이 포함되어 있어서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연습 대국이 마치자 대회 개회사와 1라운드 페어링이 있었다. 페어링과 대회 결과는 대회장의 큰 모니터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앞에는 트로피와 메달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 대회가 EGP Rome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투어 대회를 겸하기 때문에 수상하는 상의 종류가 다양했다. 내 능력이 저 트로피 중 하나를 받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유럽권 오델로 선수들과 11판을 두는 대장정을 시작하는 마음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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