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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린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이 블로그에는 '오델로 일상'이라는 제목의 글과 '일상 오델로'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옵니다.

'일상 오델로'는 제가 타 사이트에서 올리는 글을 거의 그대로 다시 올리는 글입니다.

이번에 올리는 세계대회 관련 글은 요약본 같은 글이고 이 블로그에 좀 더 깊은 내용의 후기를 쓸 예정입니다.



야구계의 명언 중 하나로 김재박 감독의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둘째 날 제 경기의 요약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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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라운드 경기는 제가 백을 잡았는데 중계를 탔습니다.

대국하는 영상이 올라오는 유튜브 중계와 실시간으로 기보가 올라오는 기보 중계가 있었는데 후자였습니다.

한국 시간으로 오후 4시에 경기가 시작했으니 한국 오델로 플레이어 분들도 보기 편한 상황이었습니다.

상대는 이탈리아의 Paolo Scognamiglio (레이팅 1984)였습니다.

제가 4달 전에 로마에서 열린 유럽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만나서 구면이었습니다.

제가 초반에 약간 유리한 상황에서 상대의 실착으로 중후반까지 유리하게 게임을 이끌어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상황을 낙관했는지 딱 한 수로 전세가 뒤집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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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38수로 A3를 뒀는데 굳이 백만 둘 수 있는 곳에 어거지로 들어가면서 흑에게 둘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얌전하게 백 38수를 F7에 뒀다면 상대를 좀 더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는데 반대로 상대에게 기회를 내 준 것이었습니다.

이 한 수로 42개로 이길 상황이 34개로 이길 상황으로 바뀌었고 수읽기가 매우 복잡해졌습니다.

그리고 후반 수읽기가 상대적으로 약한 저는 연달아 악수를 두며 39-25로 패배했습니다.


대국을 끝나고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카톡방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습니다.

워낙 형세가 유리했기에 질 수 없는 판이다, 1초에 한 수씩 둬도 이길 판이다 등 모든 분들이 상황을 매우 긍정적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후반에 와르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반응에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나중에 쉬다가 다시 상대를 만날 일이 있었는데 이 게임을 제가 이겼어야 이튿날 대회를 풀어나가기 수월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경기에서 이겼으면 10위 안에 들어가고 현실적으로 이기기 어려운 상대를 만나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경기를 지면서 중상위권에서 버텨야 되는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이튿날 경기가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9라운드 상대는 스위스의 Arthur Juigner (레이팅 2213)였습니다.

이 선수 역시 로마 대회에서 만났는데 그 때 처참하게 졌습니다.

그 때는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던 오프닝(초반 정석)으로 우위를 점하려고 했으나 끝까지 쫓아오면서 결국에는 제가 못 버티고 나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아예 다른 오프닝을 들고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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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흑 5수를 무조건 C4에 둡니다.

지금까지 세계 각지 대회에서 모인 기보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해보니 저 상황에서 98%가 C4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보다 실력이 월등히 좋은 상대를 흔드는 목적으로 C5를 둘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저보다 오프닝을 더 깊고 많이 아는 상대이기에 질질 끌려다닐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C4의 경우 서로 최선 진행 시 무승부로 끝난다고 추정하지만 C5의 경우 흑이 6점 차로 지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모든 상황에서 항상 최선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오프닝에서 돌 개수 마진 +0짜리 정석뿐만 아니라 -2인 오프닝도 자주 사용하고 가끔씩은 -4까지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6부터는 모험이었습니다.

대회 전 검토를 했을 때 상대가 최선으로 계속 받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반대로 흑 입장에서는 초반에 불리함은 있지만 악수를 둘 여지가 적고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0.5%만 갔던 길을 갔습니다.

실전에서 제 의도가 맞아 떨어져 -6의 격차가 무승부 수준으로 좁혀지기는 했으나 미세한 악수의 반복으로 다시 격차는 -6 전후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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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승부를 결정짓는 악수가 흑 37수에 나왔습니다.

좌하 모서리 부근을 빨리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에 B7을 뒀는데 이 수로 백이 좌측에 착수하기 비교적 편해졌습니다.

 37수를 B3에 뒀다면 상대는 당장 좌하쪽에 둘 수 있는 방법이 없고백이 좌상쪽에 응수해도 흑이 무난히 응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수로 경기는 23-41로 패했습니다.

 

10라운드 상대는 미국의 Yoko Sano (레이팅 1850)0이었습니다.

이 선수는 일본인으로 전날 만났던 Joseph Rose의 어머니입니다.

이 경기는 오델로 대회에서 뒀던 대국 중 최악의 경기였습니다.

초반을 두면서 느낀 것은 상대가 잘 아는 오프닝에 끌려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가 오프닝을 잘못 기억한 부분이 있어 초반에 확 불리해졌습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돌이킬 수 없는 수를 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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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36수 G3였는데 상대가 37수 A1을 두니 B1, D1을 둘 방법이 없어지고 퍼펙트 패배를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돌 하나를 잘못 봐서 한 수 만에 B1이나 D1을 둘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 엄청난 실수였습니다.

퍼펙트만은 면하자는 생각으로 최대한 수 읽기를 하였으나 돌 하나 남기는 게 전부였습니다.

복기 결과 4개까지 남길 수 있는 상황이 있었는데 1개나 4개나 오십보백보인 것 같습니다.

아들을 이겨놓으니 어머니에게 호되게 당한 경기였습니다.

전날 5승을 하고 천국에 있던 것 같던 심정은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2일차 2승 4패가 불가능한 영역이 아닌 것 같아 보였는데,

이제는 1승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게 느껴졌고 어떻게 이겨야 될지 감이 안 오기 시작했습니다.

 

11라운드 상대는 벨기에의 Frédéric Nicholls (레이팅 1596)였습니다.

이 경기 역시 오프닝 주도권을 상대에게 넘겨준 경기였습니다.

아직 제가 많은 오프닝에 경험이 풍부한 것이 아니어서 곤란한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미묘하게 불리한 상황에서 잘 버티지 못하고 중반부터 격차가 벌어졌는데 35수로 돌아올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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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수를 둘 상황에서 백은 A5에 두지 못하고, A3로 둬서 좋을 자리는 아니기에 그냥 그대로 두면 되는데 굳이 흑 35수 A3를 둬서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그냥 무난하게 B1을 둬도 됐는데 대회 때가 되면 꼭 이상하게 생각이 엇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상대도 약간의 실수를 해서 그나마 격차를 좁혔고 26-38로 생각보다는 돌을 많이 잃지 않았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상대가 첫째 날 잘하는 걸 봐서 이기기 힘들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12라운드 상대는 노르웨이의 Alexander Bøe (레이팅 1620)였습니다.

이 경기에서는 흑을 잡았는데 절대로 지면 안 되는 상황까지 만들어 놓고 거대한 삽질을 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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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터 조금씩 우세를 쌓기 시작해 40수까지 왔는데 흑 41수에서 D1이라는 큰 실수를 했습니다.

돌 개수 마진이 +26인 상황이었는데 순식간에 +0이 되어버렸습니다.

흑 41수를 G7에 두면 우하향 대각선이 모두 흑으로 바뀌고 백이 중간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상황인데 이를 놓쳤고 나중에는 역전을 허용해 27-37로 패했습니다.

(나중에는 백에게 H1을 내줄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그 때는 모서리의 실질적인 이득을 잃은 이후입니다.)

너무 상황을 낙관하고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독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저 때는 정말 변명의 여지 없이 긴장을 풀고 너무 쉽게 생각하고 방심했던 것 같습니다.

  

13라운드 상대는 체코의 Vitek Sládek (레이팅 766)라는 남자 아이였고 제가 백을 잡았습니다.

그냥 모든 것을 놓아버린 심정이었지만 레이팅 차이가 커서 부담 없이 둘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순간은 존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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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착까지는 아니었지만 32수를 B4로 둬서 상대가 둘 곳이 늘어나고 백을 괴롭힐 방법이 생겼습니다.

백 32수를 A4로 두면 상대는 질식하기 일보 직전 상태가 됩니다.

( A3 시 백 A2, 흑 A2 시 백 H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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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36수로 안전하게 H7을 택했는데 G7을 둘 경우 우하향 대각선이 다 백으로 바뀌고 흑이 F7을 둔다고 해도 백은 다시 F8으로 대각선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G7을 둬도 H8을 잃을 일이 없었는데 막연히 불안한 생각에 안전한 수를 택했습니다.

마지막 경기는 14-50로 이겼고최종 6승 7패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1일차에 비하면 확실히 지친 감이 있었습니다.

첫째 날의 제가 보면 둘째 날의 제 멱살을 잡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오델로를 공부하고 연습한지 1년 정도 됐는데 아직까지는 기본기가 많이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제가 어딘가를 두면 상대의 응수가 어떻게 될지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머리 속에 동시에 떠오르면서 평가할 수 있는데,

게임을 많이 해서 지치기 시작하면 상대의 응수가 생각이 나지 않고 제가 두고 난 이후의 모양만 머리 속에 떠오릅니다.

그래서 지치면 머리를 쥐어짜고 시간을 써야 그나마 수읽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고수들은 상황에 따라 특정 라인이나 특정 칸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어서 생각할 경우의 수를 잘 가지치기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아직까지 중후반에 수읽기가 탄탄하게 되지 않는 것도 개선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오델로에서 특정 수를 둬야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상대의 유리한 수를 봉쇄하는 의도가 있을 수 있고상대보다 먼저 유리한 형세를 갖추기 위한 수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지금 바로 착수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역습을 당할 수 있기에 방어하는 수일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언제든지 기회를 내 줄 수 있습니다.


착수의 이유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악수의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오델로는 묘수를 잘 둬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악수를 두지 않아서 이기는 게임입니다.

여러 개 수 중에 모두 다 패배로 향하는 길이고 하나만 승리를 향해 열려 있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래서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묘수를 찾는 것보다 우선으로 악수를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도 복기를 하며 이 수가 왜 좋고이 수가 왜 나쁜지 이해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대국 중 매 착수마다 모든 착수 지점에 대해 그 착수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해야 합니다.

착수 가능한 지점 중에 딱 봐도 불리해 보이는 수도 있지만 생각하지 못 한 수가 좋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복기를 할 때에는 최선 진행 시 예상 돌 개수 차이가 수치로 나오지만실전에서는 후반이 아니고서는 돌 개수를 계산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각 착수 지점 별로 가치를 판단하고 비교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수를 이해하는 것보다 그 수를 실전에서 선택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봅니다.

아직 저는 수의 장단점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도 미숙하고각 수를 비교하는 안목도 부족합니다.


대회가 끝나고 여러 사람들에게 대회의 소감을 물어봤습니다.

이튿날 첫 경기로 만난 Paolo Scognamiglio의 경우에는 오늘 2승 밖에 하지 못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또 전날 뒀던 Marcus Frönmark를 만났는데 그 분도 저처럼 6승이고 자신이 출전했던 세계 대회 중 가장 최악의 성적이라면서 시무룩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는 전날 5승 해놓고 오늘은 5연패 했다고 하면서 서로 동병상련의 심정을 느꼈습니다.

그 외에 아는 사람들과 간단히 인사를 하고 금요일 빅토리 디너 때 보기로 했습니다.

 

원래 이 글을 오늘 아침에 올리려고 했는데 약간 늦어졌습니다.

지금 시점에는 일반부 준결승 3경기가 진행 중입니다.

어제 집 들어가기 전에 Tournament director한테 붙잡혀 심판을 봐 달라는 부탁을 받아

방금 전까지 여성부 준결승 두 경기의 심판 겸 기록자를 하고 나왔습니다.

오델로 경기에 심판이 필요한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데 여성부 준결승 첫 경기에서 돌을 잘못 뒤집는 사태가 발생해 정정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작년 여름부터 오델로를 공부하면서 이런 저런 대회를 나가고 이번에는 세계 사람들과 오델로를 둬보고 싶다는 생각에 무모하게 세계대회로 향하는 길에 올랐습니다.

아직 부족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때 아니면 언제 즐기나 하는 심정으로 택했습니다.

1일차 5승에 기뻐하고 2일차 5패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오델로는 언제나 저에게 새로운 즐거움으로 다가옵니다.

이번에 세계 대회를 한 번 나가봤으니 지금보다 1.5승 이상을 거둘 수 있을 정도일 때 다시 세계 무대를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이번 경험을 계기로 좀 더 자극을 받았고 열정이 다시 불타오르게 됐습니다.

나중에 세계 대회에서 빛나기를 희망하며 지금은 이 순간을 즐겨야겠습니다.


P.S.

이 글을 쓰는 동안 준결승이 있었는데 엄청난 이변이 있었습니다.

세계대회 5회 우승, 세계대회 우승후보 1순위인 타카나시 유스케가

일본 어린이 대표인 10살 후쿠치 케이스케에게 1-2로 패하면서 6번째 우승 도전에 실패했습니다.

작년에도 결승전에 일본 어린이 대표가 올라갔었는데 올해는 새로운 어린이 대표가 결승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결승전이 기대되는 순간입니다.


* P.S. 이 글을 준결승과 결승전 사이에 처음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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