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수원 대회 이후 1달 좀 더 지나 왕중왕전이 있었다. 오델로 두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만 오프라인 대회에서 두는 것이 가장 재미있고 즐겁게다. 내 모든 에너지와 체력을 쏟아부으면서 매 착수에 대해 깊게 고민할 수 있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내 수읽기와 상대의 수읽기가 만나는 지점에서 서로의 의도를 교환하는 일종의 수담(手談)까지 느껴진다는 것이 둘째 이유이다. 그래서 대회에서 둔 대국은 어떤 오프닝으로 진행해서 어디에서 승패가 갈렸는지 대략적으로 기억이 날 정도로 강렬하게 머리에 남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기대감과 떨림이 동시에 느껴지게 되며 후회 없이 모든 에너지를 쏟고 싶다는 열의에 불타게 된다.

대회 시작이 10시부터여서 이전 대회보다 여유롭게 준비할 수 있었다. 근처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도 있어서 수원 대회 가는 것보다 비교적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버스 안에서 시맥스로 오프닝을 다시 점검하였다. 대회를 대비하여 오프닝을 준비하기는 했는데 제대로 숙지했는지 불안한 마음 때문이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여 기원 건물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리면서도 핸드폰을 붙잡고 벼락치기 하듯 오프닝 연습을 하였으나 긴장되서 그런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머리를 빠져나갔다.

55분 쯤 카페 밖으로 나가니 리치 형님과 볼짱 님, 신동명 님이 건물 앞에 있었다. 아쉽게도 영구 형님은 일이 있으셔서 참석하지 못하셨다. 영구 형님의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그 기회를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기원은 뒷 건물로 이전했다고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범근 님, 꽁 형, 거제도에서 올라오셨다는 성현 님까지 와서 다 같이 기원으로 이동했다.

 

수원 대회가 열렸던 창룡 도서관은 깔끔한 느낌이었다면 자스민 기원은 오밀조밀하면서 안정감을 주는 분위기였다. 바둑판 하나 너비에 시계 하나 놓는 정도 공간은 덩치가 큰 나에게는 살짝 좁은 느낌이 있었지만 자리보다 대회의 무게감이 긴장을 불어일으켰다. 또한 1번 테이블에는 한일전 때 사용했던 목재 오델로판이 있었고 그 경기는 인터넷으로 중계가 된다고 하니 그 판에서 둬보고 싶어지면서 대회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되었다. 또한 이번 대회 때 처음으로 1, 2등 상패가 제작이 되어 있었다. 어렵기는 하더라도 저 상패를 붙잡는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하였다.

인원 체크와 간단한 안내 이후 1라운드 시작 전까지 긴장되어 머리가 텅 비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심리적으로 안정되며 대회 결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작 5분 정도 전에 협회장 님이 1라운드 페어링을 발표하셨다.

"... 님과 ... 님은 1번 테이블이시고요. 김태연 님 계신가요? 1라운드 부전승입니다."

이 말을 듣고 저절로 양팔을 들고 만세를 하게 되었다. 부전승은 패가 많은 쪽부터 무작위로 결정이 되는데 1라운드 부전승은 말 그대로 천운이기 때문이다. 바짝 긴장해있다가 한 순간이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주변에 여러 분이 부러워했고 기쁜 기색을 숨기려고 하였으나 입꼬리는 슬금슬금 올라가고 있었다. 협회장 님께서 중계를 진행하는 동안 대국 구경을 하면서 사진을 찍으면서 시간을 보냈고 그 사이에 심리적 부담감이 많이 해소되었다.

2라운드는 꽁형과 매칭되었다. 백을 잡았고 Kung 오프닝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순간 착각을 하여 -2 최선 대신 -8로 갔고 그 이후에도 악수를 연발하였다. 하이라이트는 C 스퀘어에 착수하여 상대가 너무나도 쉽게 점프 트랩을 만들도록 허용한 것이었다. 1라운드 부전승 때문에 긴장이 너무 많이 풀어져서 그런지 악수가 잦은 것 같았고 계속 이 상태로 진행하다보면 대회 전체를 망치겠다는 생각에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다.

 

점프 트랩이나 스토너 트랩을 걸었을 때 귀나 변을 바로 차지하는 것이 은근히 불리할 때도 있고 수순을 잘못 선택하여 상황이 역전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트랩으로 빼앗기는 좌상 근처가 아니라 우변 근처와 우하귀 근처에서 수순을 진행하였고 어느 순간 해볼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검토 결과 초반에 -26까지 떨어졌으나 어느 정도 수습을 하면서 격차를 좁혔고 42-22로 이길 수 있었다. 불리했던 형국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결과였으나 간간히 나타났던 상대의 실착에 잘 대응하고 포기하지 않아서 얻을 수 있었던 1승이었다.

3라운드는 2승자끼리 대국으로 볼짱 님을 1번 테이블에서 만나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나간 1, 2회 수원대회에서 모두 볼짱 님을 만나 1승 1패를 기록했었다. 그 두 판 모두 로즈로 진행하였고 1회 때는 Greenberg/Dawg로 이어져 패배, 2회 때는 Rose-birdie/Rose-Tamenori로 진행되어 이겼다. 이번 대국 역시 내가 흑을 잡고 직각으로 Rabbit으로 갔다. 과연 이번에도 Rose로 갈 것인지 궁금해졌다. 8번째 수에서 볼짱 님은 살짝 고민한 이후 parallel rabbit으로 가는 길을 택하셨다. 13수까지는 최선길을 기억하고 있었으나 그 이후를 잘 몰랐다.

그래도 꾸역꾸역 23수까지는 최선으로 진행하고 수치도 +8까지 벌어졌으나 25수 B4는 악수였다. 착수할 당시에는 F7로 가기 위한 선택으로 생각하였으나 C3가 무난하면서도 조용한 수였다. 대각으로 뒤집히면서 백이 착수할 수 있는 지점을 늘여주는 여지를 남긴 수였다. 그 다음 백이 E8으로 진행하였으면 더 답답한 전개가 되었을 것이었으나 F2로 진행하면서 하변에서 모양을 새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원래 F7 착수를 계획하였으나 상대 역시 C7을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D8을 택하였고 그 이후 조용한 수가 이어졌고 31수 A5에서 -4가 -8까지 떨어졌다. 37수에서 좌상쪽으로 진행을 유도하기 위해 B6를 택하였는데 -16짜리 수였다. 좌상쪽 흑의 벽을 견고하게 만들어 백이 블랙 라인을 차지하고 흑이 못 끊게 상황이 전개될 수 있었다.

그런데 볼짱 님이 38수에 B7으로 X스퀘어를 바로 찔러버리셨다. -16에서 +16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대국 당시에는 내가 그렇게 불리했었는지, 이 수로 유불리가 손바닥 뒤집듯 확 바뀌었는지 바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 때부터 슬슬 백이 차지한 블랙 라인을 끊을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F1이었고 바로 D1으로 방어하였다. 이 상황에서 상변을 내주면 둘 수 있는 수가 없기에 B1을 뒀고 백은 C2로 응수하였다.

볼짱 님은 이후 내가 B3로 가기를 바랐으나 이전부터 계속 나는 C3로 진행하면 백의 대각을 자르거나 화이트라인을 흑으로 바꾼 이후 잘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은 백의 44수 A6 다음에 45수 B3로 백이 점유하던 블랙 라인을 잘랐다. 백은 46수 A2로 다시 방어하였으나 불규칙한 변을 만들면서 블랙 라인이 잘리는 상황을 늦추기 위해 47수로 A4를 택하였다. 이후 백은 A3로 응수할 수 밖에 없으며 B2로 화이트 라인을 흑이 차지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이 때 백에게는 G1으로 블랙라인을 자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이는 상변과 우변을 모두 내 주기 때문에 형세가 불리해질 것으로 판단하였다.

백은 49수 B2 이후에 50수로 G1 대신 F8을 택하였고, 이어지는 A7, A8, B8으로 흑을 끼워넣었다. 그 이후에 백은 54수 G1을 택하였고 이에 H1을 바로 차지하였다. 그 이후 A1, H8, G7, G8, G2의 최선 진행이 이어져 42-22로 대국이 마무리 되었다. 아직 3라운드 남은 대국이 있어서 그 동안 볼짱 님과 중계를 해 주셨던 협회장님과 함께 대국 내용을 다시 검토해보았다. 핵심은 이른 X 스퀘어 공격이 패착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중반에 -6 짜리 악수를 확인한 순간 등줄기에 땀이 쫙 흐를 정도로 섬뜩하였다.

 

3라운드까지 끝났을 때 3승자는 나와 김동권 님 밖에 없었다. 4라운드의 대진은 확정이 되었다. 4라운드는 점심 식사 이후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원래 간단한 점심거리를 준비했었지만 단체로 기원 옆의 식당으로 가는 행렬에 합류하게 되었다. 식당에 앉아서 제육볶음을 시킬 때, 매운 음식이 속을 뒤집지 않을까 배가 차 있는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식사를 마쳤다.

 

다음 글 - 제 2회 왕중왕전 2편, 3편 4편

728x90